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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츠토도] 5시에서자정까지

오메가버스 AU 베타X알파


표지 샘플입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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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시계


아츠시는 항상 그러했다. 그는 태어났을 때부터 상위 계층이었다. 바꾸어 말하면 타고난 모든 것들은 전부 상위계층이었다. 업계 1위의 대기업 회장인 부모의 재력, 신체능력, 두뇌, 하다못해 외모와 키마저도, 그는 상위 계층이었다. 그는 남을 내려다보는 것이 당연했고, 남보다 많은 것을 가지고 그 시기나 질투를 받는 것이 일상이었다. 사춘기 전 까지는.

어렸을 때의 경험은 세월이 지나면, 머리에서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몸은 기억하고 있다. 그 경험을 기반으로 성격이나 특유의 습관이 생기는 경우도 많다. 아츠시의 어린 경험은 항상 위에 있는 자신과 항상 그를 부러워하거나 그 부러움을 참지 못해 뒤에서 헛소문을 퍼뜨리는 멍청한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아츠시의 어린 세계에서는 그게 당연한 일이었다. 자신을 위주로 자신의 기분을 필사적으로 맞추는 사람들. 할아버지뻘의 중소기업의 사장이 자신에게 얼굴에 자리잡은 그 많은 세월을 접어가며 잘 보이기 위해 웃는 모습과, 아츠시가 좋아하는 것을 사와 손수 먹여주는 모습이 그는 웃기면서도 좋았다. 그의 세계에 있는 규율을 지키는 자들의 모습, 그래. 그 비참한 모습을 보는 걸 좋아했다.

아츠시는 모든 것이 상위계층이었다.

아마 그의 성향과 도덕성을 빼고 말이다.

알파와 베타. 그리고 오메가. 세 종류의 성향이 있다. 임신 가능성의 유무를 따지는 이 성향은, 알파와 오메가, 알파와 베타-이건 아주 극소수의 확률이다-그리고 베타와 베타의 만남으로 임신이 성사된다. 그 외에는 임신이 불가능하다. 임신하는 쪽은, 오메가나 베타로, 알파도 아주 극소수의 확률로-당연히 베타와의 조합으로만-가능하다는 설이 돌고 있다.

어리석게도 사회는 이 성향으로 등급을 나누고 있다. 알파, 베타, 오메가 순으로 나눠지는 이 등급은, 중산층에서는 크게 영향을 끼치지 않지만, 더 이상 비교할 것이 없어지는 최상층이나, 최하층에서는 굉장히 따지는 편이다. 조금이라도 우위에 서야 살아남을 수 있는 사회에서만 말이다.

그런 사회에서 살아온 아츠시는 당연히, 자신이 알파라고 생각하고 살아왔다. 태어난 환경, 부모에게 받은 유전자, 자란 환경까지 모든 것이 다 옳았으니까. 최상층에서 오메가는 거의 찾을 수가 없다. 알파와 알파의 결혼이 잦았고, 그들은 당연히 임신이 힘들었다. 아이는 베타 중에서도 가장 우수한 자의 난자를 구매, 부모 중 한 사람의 정자를 접붙이는 시험관 방식으로 만들고는 했다. 말 그대로 만드는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대를 이어갈 알파 자식은 필수였고, 그 방식으로는 거의 알파밖에 나오지 않았다. 물론 아주 작은 확률이 있지만, 그럴 경우엔, 새로 ‘만들면’된다는 생각이 다들 은연중에 박혀 있었다.

아츠시가 어릴 때, 봐왔던 또래 친구들 중 한 명이 사라진 경우가 있었는데, 아마 2차 성징이 빨랐던 그는 베타라는 판정을 받고 어딘가로 버려지지 않았을 까라는 소문이 돌고 있다. 뭐, 그런 곳이다. 윗자리를 지키는 건 노력보다는 운과 그 운을 잡아 기회로 만드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아츠시는 운이 굉장히 좋은 편이라 그 능력을 쓸 필요도 없었지만. 아직은 어린 아츠시에게 그 성향이라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가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환경에 따라 중요한 것은 바뀌기 나름이다.

베타. 평범한 시기에 온 사춘기에 남들 몰래 전문의에게 해본 검사로 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중간의 계층을 받은 것이다. 중간. 평범함. 아츠시는 당연히 알파일 것을 예상했지만. 현실은 아니었다. 솔직히 이 많은 것을 부여받았으니 하나정도는 그래도 되지. 라는 생각이 슬쩍 들었지만 그 결과지를 보고 자신을 벌레 보듯 보는 부모를 보고 깨달았다.

알파가 아닌 자신은 상류가 아니라는 걸.

아츠시의 어린 시선에서 본 세계와는 다르게 현실의 사회는 꽤 잘 짜여 있었다. 자본주의만큼이나 보이지 않는 것들에 의해 계급이 나뉘어졌다. 아츠시의 뒤를 봐주는 비서는 물론 그와 동급으로 움직이는 모든 자들은 전부 알파였다. 개중에 베타도 있었으나, 취급은 알파와 극과 극이었다. 가끔 같은 동류의 자가 오메가인 것이 들키면 호적에서 파이거나, 혹은 그 능력을 살려 몸을 팔아 그 자리를 유지하고는 했다. 일반인이라고 통칭되는 중산층들에게는 크게 차이가 없었다. 단지 아츠시는 상위이기에 그것에 신경을 쓰는 것이었다. 순혈 애완견을 자랑하는 것만큼 할 짓이 없는 자들이 하는 행위였다.

그의 어린 친구처럼, 그는 버림을 당할 수 있었지만, 그가 가진 것들에 대해 부모는 꽤 만족을 하고 있었고, 기업의 회장인 아버지를 따라 어릴 때부터 사석을 많이 참가해, 얼굴도 꽤 팔린 상태였기에, 그런 처리는 당하지 않았다.

단지 오메가가 아님에 안도할 여유조차 없이, 그는 부모의 보이지 않는 압박에 알파인 척 연기를 하게 되었다.

아츠시의 처음은 그가 타고난 성향에 의해 시작되었다.

아츠시는 그 날 이후로 반듯해졌다. 원래 구속당하는 걸 싫어하는 성격이라, 정장도 제대로 잘 입지 않았었지만, 자신의 성향이 이 세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걸 안 이후로는, 윗단추 한 두 개정도는 풀었던 셔츠를 목 끝까지 잠그고, 헐겁게 했던 넥타이도 유모가 해준 대로, 그대로 반듯하게 두었고, 자켓마저도 풀지 않은 채로 있었다. 꽤 비싼 고가의 손목 시계도 하고 다녔다. 어릴 때, 초등학교 입학선물로 아버지가 선물해 준 것이었는데, 스위스 장인이 손수 만들고, 아버지가 써준 아츠시의 이름이 시계에 적혀있는 세상에서 하나 뿐인 손목 시계였다. 아츠시는 손목에 느껴지는 묵직함에 자신의 책임을 느끼고, 시계 판에 적혀있는 자신의 이름을 보며, 해야 할 일을 기억했다.

그 해야 할 일이라는 건, 거짓말이었다. 아츠시의 첫 거짓말도 성향으로 인해 시작되었다. 그는 항상 자기 자신을 자유롭게 표현했다. 하지만 이제 그럴 수 없다. 알파라는 거짓말로 시작된 큰 파장으로 인한 모든 행동을 아츠시는 연기해야했다. 문득 어렸을 때, 잠깐 아역배우로 활동했던 것이 떠올랐다.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대부분 베타나 오메가인 연예인을 싫어하는 아버지로써는 꽤 파격적인 생각이었다. 지금 떠올려보면 아츠시의 그 행보는 약간의 보험이 아니였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소름 돋을 정도로 철저한 사람이니까.

아츠시는 다른 알파들의 다분히 의도가 자랑인, 성경험에서 영혼 없는 동조를 하고,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의 모임에서는 간혹 느껴지지 않는 오메가의 냄새를 아는 척하며 발정난 개처럼 취향도 아닌 오메가에게 달려드는 척도 해야 했다. 작은 애무에도 자지러질 듯 비명을 지르며 침을 흘리는 오메가를 보며 아츠시는 그 때마다, ‘그래 오메가가 아닌 게 어디야.’ 라는 생각을 했다.

어릴 때의 기억은 습관을 만들었고 아츠시의 기억은 남을 밑으로 보는 습관을 만들었다. 습관이라는 건, 자신은 잘 모르는 행동이다. 그리고 최상위의 최고자리에 군림해있는, 아츠시에게 그 습관에 대해 비난을 할 유일한 사람은 한 사람 뿐이다.

"베타주제에."

이 말을 종종 하는 마츠노 토도마츠, 그 솔직함에 아츠시는 자주 웃었다. 그의 부모를 제외하면 아마, 유일하게, 자신의 기분에 전혀 맞춰주지 않는 사람. 자신의 돈으로 살아감에도, 자신에게 절대 굴복하지 않는, 오히려 자신을 깔보는, 이 사람은, 아츠시의 유일한 친구다.


그를 만난 건 자신의 베타에 대한, 거짓말이 버거웠던 어릴 때였다. 아마 고등학교 3학년 쯤 되었을 것이다. 꽤 계획적으로 했던 가출이었기에 모아둔 용돈으로 며칠 친구들과 여행을 가는 척 하며 가방을 싸 아침 일찍 집을 빠져나왔다. 그리고는 멍하니 돌아다니기만 했다. 그는 취미가 없었다. 하고 싶은 것도 없었다. 단지 부모가 시키는 교양을 쌓기 위한 취미를 하며 부모의 사업을 물려받기 위한 공부를 하고 살아왔다. 무작정 지하철을 타고 여러 곳을 돌아다녔지만 전혀 하고 싶은 것이 없었다. 교통비가 이만 엔을 넘어가고 해가 지고 있을 즈음에 그는 어떤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도착했다기 보다는 그냥 지하철에 물려 내려버린 거지만. 역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자신이 사는 같은 도쿄라고 생각하기도 힘든 곳이었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아 배가 고플 만도 했지만 이상하게도 그러지 않았다. 단지 자신이 살아온, 그 나름대로, 긴 세월에 대해 가진 의문점으로 머리가 아플 뿐이었다. 무작정 걸어 공원의 벤치에 앉아 하염없이 분수를 보고 있었다.

나는 부모를 위해 살아온 것인가. 내가 받은 이 수 많은 칭송과 사랑은 사실 내 뒤에 있는 부모들을 위한 것인가. 그렇다면 나는 상위가 아니라 단지 상위인 척을 하는 평범한 사람이 아닐까.

그래서 내가 베타인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까지 미쳤을 때 그는 죽고 싶다라는 생각을 했다. 평생을 상위층에서 살아왔지만 그 실상을 보니 전혀 그렇지 않은 자신이 싫었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 그래. 위화감이 들었다. 상위가 아닌 자신은 싫었다. 자신보다 높은 이들에게 아부같은 짓을 해서라도 자신의 계층을 지키려는, 그 비참한 짓은 도저히 못 하겠다. 어떻게 해야 하지. 아츠시는 머리가 아팠다.

머리를 쥐어 싸고, 끙끙 앓는 자신의 옆에 누군가 털썩 앉았다. 그리고는 아츠시에게 말을 걸었다.

"뭐해? 어디 아파?"

그 목소리에 아츠시는 고개를 들어 자신의 옆에 앉은 사람을 봤다.

처음 보는 사이임에도 넉살좋게 말을 거는 그는 교복을 입고 있었다. 자신과 같은 또래로 보였다. 누구와 말을 하고 싶지도 않은 상태였던 그는 괜히 화가 났다. 이럴 때도 자신을 가만 두지 않는 사람들이 싫었다. 노려보며 꺼지라는 눈빛을 보냈지만 상대는 그 눈빛에도 웃으며 머리가 아프냐는 둥 옷이 멋진데 데이트라도 하냐는 둥의 얘기를 꺼냈다. 그 눈치 없이 밝은 목소리에 아츠시는 어이가 없어졌다.

눈 때문인가 아츠시는 머리를 싸매던 손을 내려 자신의 눈가를 꾹꾹 눌렀다. 반쯤 감겨있는 처진 눈. 이 눈 덕분에 느긋해 보인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자신의 서툰 연기에도 다들 알파로 알고 있는 이유도 이것 때문이다. 거짓말에 긴장해도 여전히 느긋해보였기에. 대답 없는 아츠시를 보며 연신 웃는 얼굴로 말을 거는 소년은 그의 가방에 손을 대며 말했다.

"근데 어디 놀러가? 가방 크네?"

대답을 하지도 않았는데 자꾸 말을 거는 그가 귀찮았다. 그리고 그가 뭘 원하는 지도 아츠시는 대충 눈치 채고 있었다. 자신의 옷차림을 보고 돈이라도 뺏으러 온 양아치겠지. 주말에도 교복을 입고 있는 것을 보니 가출을 한 것이 분명 하다.

아츠시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훑어봤다. 걸친 교복은 조금 낡아있었고 와이셔츠는 다리지 않아 제멋대로 구겨져있었다. 낡은 천 가방에 신발은 딱봐도 조잡해보였다. 돈이 많아 보이지는 않았다. 아니 솔직히 없어보였다. 아츠시는 속으로 비웃었다. 대놓고 자신을 위아래로 훑어보는 아츠시가 불쾌할 만도 할 텐데 -솔직히 그는 그러기를 바라면서 한 행동이지만- 소년은 여전히 연신 웃는 얼굴로 그의 가방을 만지작거렸다.

"얼굴 보니까 여기서는 처음 보는데 여기로 놀러 온 거야?"

"얼마 필요한데?"

소년의 질문에 아츠시는 되물었다. 그는 거짓말하는 상황에 물려있었고, 옆의 소년이 귀찮았으며, 뻔히 속보이는 말에 대답할 가치도 없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자신이 어떻게 대하든, 그 돈 없는 양아치는 어떤 영향도 끼치지 못 할테니. 그 말에 소년은 놀란 듯 행동을 멈추었지만,여전히 웃는 표정을 유지하며 아츠시의 가방에 손을 떼고는 손바닥을 펴 그에게 내밀었다.

"말이 통해서 편하네. 오천 엔."

"넌 싸서 편하네."

아츠시는 생각보다 터무니없이 싼 돈에 눈썹을 살짝 올리고는 뒷주머니의 지갑을 꺼내 수많은 만 엔 중 한 장을 꺼냈다. 자신의 말에 화를 내지 않고 여전히 웃는 모습이 바보 같았다. 그런 그를 화내게 하고 싶어져 아츠시는 가시돋힌 말을 또 꺼냈다. 표정은 최대한 거만하게.

아 어릴 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내가 가장 최상위인 줄 알았던.

"그런 돈은 없어서.“

소년의 손바닥에 툭하고 만 엔을 올려줬다.

그 때였다.

소년은 아츠시의 손을 꾹 쥐고 잡아당겨 자신의 품에 그가 안기게 했다. 생각보다 센 힘에 아츠시는 놀라 저항을 할 새도 없었다. 반대편 손에 있던 묵직한 지갑의 무게가 사라지는 것 또한 순식간이었다. 지갑이 없어진 것을 깨닫던 순간은 자신은 이미 그에게 세게 밀쳐져, 내팽겨진 후였다. 멍하니 벤치에서 멀어져가며 자신의 지갑을 보라는 듯 흔들며 달리는 소년을 보고 아츠시는 이빨을 뿌득 갈았다.

자신은 최상위층이다. 성향과 도덕성은 빼고 말이다. 그런 날. 감히.

아츠시는 곧바로 가방을 들쳐 메고, 튀어 오르듯 뛰기 시작했다. 달리기는 자신있다. 솔직히 어떤 운동이든 꽤 잘하는 편이다. 빠른 속도로 쫓아오는 자신을 눈치 챘는지, 소년은 사람이 많은 골목으로 가기 시작했다. 수많은 사람을 밀치고 뛰는 그를 보며 아츠시는 멍청하다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능숙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글쎄. 잔머리를 굴릴 줄은 알지만 현명하지는 않았다. 아츠시는 주위사람들을 힐끗 둘러보았다. 자신은 딱 봐도 여기에 어울리지 않는, 좋은 옷만 걸친 순한 인상이었고, 그는 주말에도 교복을 입고-그것도 제대로 입지도 않은 채로- 어울리지 않는 지갑을 들고 뛰고 있었다. 게다가 자신의 외견에 꽤 많은 사람이 주목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게임 끝이네. 그는 최대한 안타깝게 소리를 쳤다.

"소매치기야!!"


큰 키와 꽤 괜찮은 외모의 좋은 옷을 빼입은 어린 미남의 목소리에 주위 사람들은 빠르게 그 소매치기를 잡아, 그의 앞에 대령해주었다. 남을 부려먹는 법은 이미 도가 터있던 그였다. 숨을 고르며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소년은 팔로 땀을 훔쳤다. 그런 그를 내려다보며, 아츠시는 주위사람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몇 번이나 했다. 사람들은 별 일이 아니라며 손 사레를 쳤다. 그리고는 이런 착한 청년의 지갑을 빼앗은 소년을 비난하기 바빴다. 아츠시는 그 비난을 막지 않았다. 허나 자신에게 향하는 비난을 듣는 둥 마는 둥, 소년은 그 자세 그대로 앉아있었다. 달리기가 빠른 편도 아닌데 뭣하러 이런 짓을 하는 걸까.

아츠시는 그 안타까운 생명에 혀를 찼다. 잘하는 것도 없는 게 멍청하기도 하다니.

주위의 사람들이 몰리자 아츠시는 소년의 팔을 잡고 일으켰다. 어찌되었든 자신은 가출중이고, 이 군중 속에서 얼마 되지 않는 확률이지만, 자신을 아는 사람이 있을 지도 모른다. 금융관련자나 큰 사업을 하는 자 혹은 주식찌라시를 읽기 좋아하는 족속들도 그의 얼굴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더 크게 일을 벌이기는 싫었기에, 아츠시는 그를 잡고 사람이 적은 골목으로 이끌었다. 가기 싫은 듯 처음에는 반항하던 그였지만, 이내 그의 힘에 끌려 따라갔다. 골목에 도착해 팔을 놓자 소년은 그제야 고개를 들고 아츠시를 쳐다봤다.

잘못한 것이 없다는 듯 그를 내려다보는 느낌이 드는 시선이었다. 키는 아츠시가 더 컸지만. 그리고는 먼저 입을 열었다.

"뭔데?"

"뭐?"

잘못했다고 애원하는 말을 바란 것은 아니었지만 생각보다 너무 당당하게 의도를 묻는 모습에 아츠시는 벙 찐 듯 그를 쳐다봤다. 소년은 쥐어진 주먹들 펴 아까 받았던 만 엔을 집었다. 빳빳했던 지폐는 엉망진창으로 구겨져있었다. 소년은 그것을 자신의 주머니에 넣으며 아까보다 훨씬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우선 이건 준 거니까, 가질게."

"넌 자존심도 없어?"

아츠시는 어이가 없어 다시 말을 뱉었다. 그의 말에 소년은 눈을 예쁘게 휘며 웃었다.

"그게 새 옷이라도 사줘?"

이게 아츠시와 토도마츠의, 첫 만남이었다.





1. 5시


그 첫 만남의 끝은 그의 말에 벙 찐 아츠시를 두고 소년이 작별인사도 잊지 않고 하고 난 후였다.

할 말은 그게 다냐며 대답을 바라지도 않았던 질문을 하고 난 소년의 경쾌한 발소리가 멀어지고 나서야, 아츠시는 정신을 차리고는 웃기 시작했다.

하위계층, 뭐를 따져도 하위의 하위인 주제에 자신과 같은 생각인 것이 웃겼다. 자존심이 새 옷을 주냐는 말.

옷가지정도를 살 가치도 없는 자존심.

그들보다 한참 어린 소년에게 무릎을 꿇고, 애정을 갈구하며, 권력을 나눠먹기 위해 지랄을 하는 사람들을 비웃듯, 내가 그들에게 속으로 혹은 시선으로 하는 말과 비슷했다. 그들은 그 와중에도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 만날 때 마다 그들 나름의 최상의 옷을 입고 오곤 했다. 누구 말마따나 그런다고 뭔가 더 생기는 것도 아닌데. 오히려 내 심기를 거슬리면, 거슬렀지. 뭔가를 요구할 때는, 그에 상응하는 짓을 하길 바라는 게 당연하니까. 쓸데없이 자존심을 세워봤자, 자신이 밑이라는 건 분명하고, 상대에게 아양을 떨어야 원하는 걸 얻는 것 또한 자명한 사실인걸.

아츠시는 너무 웃어 배가 아팠지만, 배를 잡고 눈물이 날 정도로 웃었다. 그 웃음은 소년이 아니라 자신의 밑에서 눈치 보는 모든 자들을 향한 비웃음과 자신의 감정이 누군가에게 동의를 받은 느낌에 나오는 웃음이었다. 눈가에 맺힌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 바닥으로 흐를 때까지 웃었다. 살면서 이렇게 오래 웃은 적은 없었다. 속이 시원했다. 참아온 모든 것을 풀어 놓을 수가 있었다. 사회생활을 어릴 때부터 해와 한심한 족속들에게 빈 말을 건네고, 속이 훤히 보이는 칭찬에 웃으며 고맙다고 하며 묶어온 감정들을 털어놓을 수 있었다.

그 길로 곧바로 집으로 돌아갔다. 미성년자인 자신은 어렸고 얼마 되지도 않는 -아츠시의 기준에서는-돈으로는 금방 그 소년처럼 될 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여행이라는 말로 아침에 나간 아들이 하루도 되지 않아 돌아온 것에 부모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오랜만에 보는 그의 밝은 얼굴에 그러려니라는 생각을 하며 맞아주었다. 뭐 그런 것에 관심이 있는 부모는 아니지만, 적어도 밖에서 사고를 치지 않았다는 안심 하에 맞아주었겠지.

아츠시는 그 날 이후로 곧바로 착한 아들에 돌아왔다. 부모의 권위를 지켜주는 거짓말을 스스럼없이 하는 착한 아들로. 날이 갈수록, 알파라는 거짓말은 익숙해졌고, 최상위가 아닌 자신에 대한 자괴감 또한 옅어졌다. 소년의 치기어린 말이 자신을 위로해주듯 힘들 때마다 떠올랐다. 자신에게 새 옷을 주는 것은 베타가 아닌 부모의 재력이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은 그냥 이렇게 살아가면 된다. 어쩌면 이건 거짓말이라기보다는 삶의 대처 정도가 아닐까. 라고 생각하며.

그렇게, 아츠시는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부모가 원했던 대학인 게이오대의 경영학과로 입학한 날이 되었다. 아츠시는 그다지 기쁘지 않았다. 일본 최고의 대학인 도쿄대가 아닌, 그 밑의 대학을 바랐다는 것부터가 심기를 건드렸다. 도쿄대에 충분히 갈 수 있는 성적이었다. 어릴 때부터 그의 목표는 도쿄대였고, 부모는 거기에 아무런 말도 없었다. 물론 그의 성향을 알기 전까지는 말이다.

하지만 부모는 베타인 자신을 깨달으라는 듯 게이오대를 가라는 말을 내뱉었다. 공부만 해, 정치 관련인재는 거의 없는 도쿄대보다는 다양한 정치적 인맥을 쌓을 수 있는 게이오대를 가라는 말은 핑계처럼 들렸다. 당연하지. 도쿄대는 더럽게도 숨겨진 입학기준에 알파만 가능하다는 속설이 있다. 괜히 지원이라도 했다가, 자신이 베타인 것을 도쿄대 관계자들에게 알려봤자-아버지는 게이오대를 졸업했고, 거기에 인맥이 많았기에 내 성향 따위는 잘 숨길 수 있었다-좋을 게 없단 소리겠지.

아츠시는 다시금, 현실을 마주하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길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가 도쿄대를 희망한 건, 도쿄대가 일본 최고의 대학인 것뿐만 아니라, 아버지가 닦아놓은 길만을 걷는 도련님이라는 주위의 말을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서였다. 아버지의 재력 때문이 아니라, 내 자체가 최상위이기에 이 자리를 지킬 수 있다고, 알려주고 싶었다. 아버지의 흔적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도쿄대에 들어가, 거기의 인맥을 넓혀가고 싶었다. 아버지도 그것을-도쿄대의 새로운 인맥을-바랐기에 어릴 때의 나에게는 도쿄대를 목표로 공부하라는 말을 했고.

“하.”

아츠시는 정장의 넥타이를 반듯하게 맨, 자신의 모습을 비추는 거울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조금 있으면 출발해야 된다는 유모의 말이 문 밖에서 들렸다. 부모님 또한 자신의 입학식에 참가한다. 자신보다 아버지가 더욱 주목될 걸 생각하니, 입학식에 가고 싶지 않았다. 수석입학인데다 , 신입생대표였기에, 무대에 올라 비서가 써준 대본을 읽어야한다. 받은 지는 꽤 되었지만, 볼 때마다, 짜증이 나 읽지도 않고 책상 구석에 놓여있는 대본에는 분명 아버지라는 말이 열 번은 들어가 있을 것이다.

자신이 아버지가 졸업한 게이오대에 들어가면 다들 아버지의 뒤를 따른다고 하면서, 자신을 아버지의 이름 뒤에 2세를 붙여 부르겠지. 그렇다고 도쿄대에 지원할 수도 없었다. 아버지의 말은 전적으로 옳았기 때문이다. 손해 보는 짓은 하지 않아야한다. 지금 내가 가는 길이 맞다. 는 생각을 몇 번이고 했지만, 속에서 뭔가 끓어오르는 건 참을 수가 없었다.

아츠시는 그럴 때마다, 더러운 골목에서 만났던 소년이 떠올랐다. 소년에게는 새 옷인 것처럼 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아버지의.

“후.”

어쩔 수 없다. 아츠시는 숨을 크게 내쉬고 책상에 올려져있는 대본을 잡고 방문을 열었다. 늦은 시간인 듯 초조해하는 유모의 표정이 보여, 습관적으로 손목을 확인했다. 아. 시계가 없었다. 다시 방으로 들어가 서랍을 열었다. 아버지가 선물한 시계 말고도 여러 종류의 시계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 중에서 그는 불과 몇 달 전에 가출을 했을 때 꼈던, 세상에서 가장 흔한 시계를 집었다. 어딘가에 팔아도 주인이 누구인지가 들키지 않을 만큼 가장 흔한.

이게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자유였다.

보채는 말을 하지는 않지만, 그를 따라와 대신 시계를 채워주는 유모를 봤다. 어릴 때부터, 나를 키워왔던 사람이기에 그의 심기를 거스른 말은 하지 않는다. 평생 숙이고 다녔을 그 하얀 정수리를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긴장되네.”

“잘 하실 수 있을 거예요. 항상 그랬듯이.”

고개를 들어 얼굴에 새겨진 주름을 접으며 웃는 얼굴과 나직이 말하는 목소리는 진심이 담겨있었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금방 싫증나는 성격에도 아츠시는 그 사람만을 내 측근으로 인정했다. 부모보다도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고마워.”

아츠시는 약점을 쥐지 않으면, 상대를 믿지 못한다. 이건 그가 베타라는 걸 듣기 전부터 그래왔다. 아버지의 교육도 있었겠으나, 그것보다는 환경이 더 큰 영향을 끼쳤다. 높은 위치에서 태어난 자는 수많은 거짓과 빈 말을 안고 살아오니까. 그에게 시계를 차주고는 힘내요라는 말을 하는 자는 그의 주위에서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자이자, 오메가인 자다.

베타를 제외한 알파와 오메가는 히트사이클이라는 기간이 있다. 쉽게 말하면 발정기 같은 거다. 확실히는 모르지만 이론상으로는 그렇다고 들었다. 그 시기를 발현한다고 하는데, 발현한 오메가는 알파만 맡을 수 있는 달콤한 향이 나고, 알파를 원한다고 들었다. 그리고 그 때의 알파는 별개의 향은 나지 않으나, 성향에 상관없이 누구나 임신을 가능하게 하며, 오메가는 그 반대다.

아츠시가 유모의 비밀을 안 건, 베타라는 결과가 나오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나이가 꽤 있는 유모는 간혹 날짜를 잊고는 하는데, 히트사이클 기간 전에 그것을 순화시킬 약-이걸 먹으면 사이클이 오지 않는다고 한다.―을 먹지 않아, 그의 앞에서 발현을 한 적이 있었다. 그 때, 유모는 아츠시의 성향에 대해 눈치를 챘고,-아마 이성이 있었더라면-그 또한 그랬다. 침착하고, 느긋한 유모가 어린 아이처럼 뭔가를 갈구하듯, 온 몸에서 분비물을 쏟아냈고, 아츠시는 거기서 그걸 멍하니 봤기 때문이다. 발현된 오메가를 돌릴 수 있는 건, 아마 알파의 성욕뿐이라는 얘기를 들었기에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다른 알파를 불러오는 수밖에 없었다.

그 다음날 유모는 그가 본 적 없는 안타까운 얼굴로 그에게 빌었다. 제발 비밀로 해달라는 말이었다. 어쩌면 아츠시의 비밀도 쥐고 있으면서, 그걸 사용하지 않고, 진심으로 부탁하는 모습에 그는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고 그녀를 범했던, 자신의 비서에게 내 비밀을 들킨 것 같다는 말을 넌지시 어머니에게 했었고, 또 다음날 그는 어디론가 사라져있었다. 그 때 이후로 아츠시는 처음으로 믿을 수 있는 상대가 생겼다.


입학식을 향하는 차 안은 적막이 흘렀다. 항상 그래왔기에 별 상관은 없었다. 교문 앞에서 내리면, 대기하는 기자들에게 사이가 좋은 모습을 보여야하기에 어쩔 수 없이 가족 전부가 갈 뿐이니까. 아츠시는 대본을 천천히 읽었다. 쓸데없이 길었다. 길게 할 필요도 없는 말이다. 아츠시는 재킷 안주머니에서 만년필을 꺼내, 필요 없는 것들을 두 줄로 그어 지워갔다. 아버지의 얘기라던가 회사의 얘기, 너무 거만한 말들을 전부. 그러자 네 페이지나 되었던 대본은 한 페이지로 줄었다. 지저분해진 대본을 다시 읽고 나자 도착한 듯, 차가 멈췄다. 대본을 접어, 만년필과 함께 안주머니에 넣었다.

먼저 차에서 내려, 어머니를 에스코트하자, 사방에서 찰칵이는 소리와 함께 플래시가 터졌다. 이 나이가 되도록 입학식에 부모님을, 그것도, 같이, 데려오는 사람은 자신 뿐 일거라는 생각에 기분이 좋지 않았다. 성인이라는 건 생각보다 독립적이지 못했다. 기자들 사이로 뚫려있는 교문을 앞서가는 아버지를 따라, 어머니의 손을 잡은 채로 걷기 시작했다. 한심하기 짝이 없는 그림이다. 뭔가 질문을 던지려는 기자들에게 아버지는 손 인사 하나로 모든 것을 답변했고, 어머니 또한 그랬으며, 아츠시는 그들의 인형처럼 웃고만 있었다. 입학식이 끝날 때까지, 이런 식이라니 어디 도망이라도 가고 싶었다. 각종 파티나, 사회 모임에서는 당연한 일이었지만 학교에서까지 이런 식이라니, 이제 나에게 사생활이라는 건 없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선포와 같았다.

“어서 오십시오.”

식당에서 들릴만한 인사말이 들려, 아츠시는 고개를 돌렸다. 교문을 바로 옆, 나이가 꽤 많은 여자가 서있었다. 씨발. 아츠시는 속으로 욕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반갑게 그를 맞이했다.

“네. 오랜만입니다. 이사장님.”

오랜만일리가. 아츠시를 신입생대표로 세워준 그 노친네를 분명 어제도 아버지는 만났을 것이다. 그는 이 세계 사람들이 전부 그렇듯, 그 성향에 대해 계급을 나누고 있는 자이고, 당연히 아츠시가 베타인 것을 알고 나서는 기세등등해져 요구하는 게 많아졌다. 아츠시의 입학과 그 이후의 일에 대해 잘 부탁한다며, 아버지는 많은 돈을 그의 재단에 밀어 넣었다. 그 돈이 얼마인지는 모르겠지만, 덕분에 회사와 이사장의 관계로 별의별 얘기가 돌았다. 회사의 비리라던가 그런 것들은 전부 상관없지만, 대학교의 입학식에 이렇게 많은 기자들이 모인 요인이다. 과연 아츠시의 성적은 게이오대에 입학이 가능한가? 라는 칼럼까지 나오게 한 요인. 그래서 무슨 동물원 원숭이마냥, 그의 고등학교와 대학 입학시험의 성적표와 시험지까지 공개하게 한 요인.

“아츠시. 입학을 축하한다.”

그래 덕분에 많은 사람들에게 의심을 받는다.

“네. 감사합니다.”

아츠시는 그를 내려치고 싶은 마음을 담아 고개를 살짝 숙였다. 기자들이 다시 몰리고, 부모님과 이사장의 인터뷰가 진행되었다. 아츠시는 한 발짝 물러섰다. 그에 대한 이슈는 끝이 난 걸로 알고 있다. 공개를 한 이후에는 더 이상 덜미를 잡을 수가 없어 물러섰으니. 카메라에 잡히기 싫어 조금 더 물러섰다. 조금 더. 조금.

툭.

“아, 죄송합니다.”

보지 않고, 뒤로 천천히 걷다보니, 누군가와 부딪혔다. 아츠시는 고개를 돌리며 사과했다. 그리고 그 사과를 받는 자는

“괜찮아. 퉁치지 뭐.”

불과 몇 달 전에 봤던 익숙한 소년이었다. 아츠시는 당황해 그를 쳐다만 봤다. 그는 그런 것에 상관없이, 웃으며 벤치에 앉았던 그 때처럼, 친하게 말을 걸었다.

“오랜만이네? 너 생각보다 유명하더라? 신문에도 나오고.”

“너….”

“아, 잡지에도 나왔지? 기억난다. 너 이름이 뭐더라. 꽤 흔한 이름이던데.”

“어떻게….”

“아, 아츠시 맞지?”

아츠시는 소년의 입에 자신의 이름이 담기자 번뜩 정신이 들었다. 침착해야 된다. 자신의 뒤에는 기자들이 있고, 빌어먹을 노친네의 인터뷰가 끝나면 자신의 가벼운 얘기라도 들어갈 것이 분명하니까. 후. 아츠시는 고개를 돌려 기자들의 무리를 봤다. 아직 인터뷰가 진행되는 듯 했다.

“저기 뭐하는 건데? 연예인이라도 왔어?”

자신보다 키가 조금 작은 소년은 아츠시의 옆으로 서, 고개를 기웃거렸다.

“부모님이야.”

“그래? 뭐야. 일하다가 사람이 많아서 와봤더니.”

시시하네. 투정부리듯 말을 내뱉은 소년을 보니, 남색 청소부 옷을 입고, 한 손에는 그의 키만 한 대걸레를 쥐고 있었다. 아. 아츠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부딪힌 어깨를 손으로 털었다. 그리고는 소년을 내려다봤다.

“그래도 너 생각보다 성실하네.”

“아, 이거? 형 대타야. 도망쳤거든.”

비꼬듯이 하는 말에 소년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도망쳐?”

예상외의 대답에 아츠시는 미간을 찌푸렸다. 소년은 쯧하고 혀를 차고는 대답을 하지 않은 채, 말을 돌렸다.

“너 그럼 여기 다녀?”

대놓고 말을 돌리는 것에 아츠시는 응했다. 소년의 말로 자신의 생각이 좀 바뀌긴 했지만, 여전히 그는 자신과 전혀 다른, 중, 아니 이제 보니 하위층이니, 같이 있어봤자 좋을 건 없었다. 게다가 이렇게 기자가 있으면 더더욱. 아츠시는 이 대화를 끝내기 위해 짧게 대답했다.

“뭐 대충.”

“흐음. 그럼 나 좀 재워줘.”

그 맹랑한 말에 아츠시는 큰 소리로 대답했다.

“뭐?”

소년은 태평하게 웃었다. 너 표정 웃기네.

“나 잘 곳이 없거든. 부모님도 도망갔어.”

그 말에 아츠시는 멍하니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아츠시를 보며, 소년은 막 웃었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자신이 부탁하는 주제에, 우위에 있는 듯 짓는 표정에 아츠시는 정신을 부여잡고 다시 소년을 봤다. 그는 대걸레를 세워 몸을 기대고는 아츠시를 올려다보며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응? 너 돈 많잖아. 집에 방도 많을 거 아냐.”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아츠시는 그 말에 속으로 생각했던 말을 내뱉었다. 아차. 자신이 생각해도 정말 유치한 말이었다. 유치하다는 건, 아츠시 나름의 평가였다. 조금 더 좋게 둘러말하는 법을 알고 있음에도, 하지 못하는 것. 마치 사회생활이 처음이라, 해야 할 말과 아닌 말을 구분 하지 못하는 것. 몇 달 전, 자신의 눈앞에 있는 청소부와 만났을 때도 그랬었지. 쓸데없을 정도로 그를 도발하기도 했고, 과한 말을 내뱉기도 했다. 지금은 그 반대 같지만. 어찌되었든, 그의 앞에서 아츠시는 거짓말을 모르는 어린 아이마냥 자신의 속말을 다 뱉어내고 있었다. 거짓말이 필요 없는. 자신을 숨길 필요가 없는. 그러니까 잘 보일 이유가 없으니까. 그래 그러니까. 아츠시는 그렇게 자신을 위로했다.

소년은 아츠시의 그 비웃어도 마땅한 말에는 별 대응을 하지 않고, 부탁한다는 말만 했다. 아츠시는 미간을 찌푸렸다. 머리가 아팠다.

부모님의 인터뷰가 끝났는지, 몰려오는 기자들에, 아츠시는 소년에게 우선 가라는 식의 손 인사를 했다. 하지만 소년은 굳건히 서있었다. “제대로 말 안 해주면 안 갈 거니까.” 라는 말에 아츠시는 주머니에 있는 지갑에서 자신의 명함을 내밀었다. 소년은 그걸 받고서야, 기자들 앞에서 보라는 듯, 태평하게 자신의 일을 하러 돌아갔고, 기자들은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고 그의 가치를 가늠하자, 무시했다. 그리고는 아츠시에게 인터뷰를 하기 시작했다. 주제는 뭐 입학에 관한 것이었다. 아츠시는 한숨을 돌리고, 최근 잡지든, 신문이든, 어디서든 나오는 몇 번이고 했던 말을 또 하기 시작했다. 그걸 들으면서 기자들 사이에서 대걸레로 설렁설렁 여기저기를 닦는 척을 하는 비웃는 청소부를 쳐다보면서 말이다.

아츠시는 뭔가에 홀린 듯이, 멍한 정신으로 스케줄을 헤쳐 나갔다. 인터뷰 후, 이사장과 사이좋은 사진을 찍을 때도, 학 내의 카페에서 부모님과 즐거운 가족모임을 연출할 때도, 머릿속에는 그 소년을 어떻게 해야 하지라는 생각뿐이었다. 명함을 줬으니, 분명 연락은 올 것이고, 부모님에게는 어떻게 얘기를 해야 하며, 그와 어떻게 만났는지까지 세세하게 얘기해야 할 것을 생각하니 머리가 아팠다.

“제가 오늘 이 자리에 선 이유는….”

단상에 올라, 최대한 사무적인 표정으로 대본을 읽어 내려갈 때도, 머릿속은 그것뿐이었다. 참으로 한심했다. 그렇게 주목을 받고, 분명 모두의 부러움을 한 몸에 사는 사람이 청소부 하나 때문에 이렇게 골머리를 앓고 있을 줄은. 아츠시는 자신도 모르게 조소가 나왔지만, 이내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을 이어 내려갔다.

“이런 말이 있죠.”

아츠시는 대본의 다음 대목을 알고 있다. 시작은 미미하지만 끝은 창대하리라. 정말 상투적인 말이다. 입에 담기도 싫다. 아츠시는 자신의 머릿속에 맴도는 그의 말이 떠올랐다. 단상에서 해도 되는 말일까라는 생각이 닿기도 전에 입이 먼저 나갔다.

“자존심으론 값싼 물건도 얻지 못 한다.”

그 말에 강당에 가득 메우던 침묵이 조금 깨진 느낌이 들었다. 아츠시는 바로 앞에 앉아있는 아버지와 눈이 마주쳤다. 만족스럽지 않은지, 살짝 얼굴이 구겨져있었다. 아버지를 내려다보는 건 처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 개의 계단이 있을 뿐인 그리 높지도 않은 단상이지만 이상하게도. 그 거리가 멀게 느껴졌다. 자신이 한참 위에 있는 것만 같아서. 그래서.

아버지에게 모든 걸 알려줄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움과 자존심은 전혀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무언가를 배우려는 자세에서 자존심을 세우는 분들이 간혹 있습니다. 그런 자존심으로는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이젠 내가 뭐라고 지껄이는 지도 모르겠지만, 아츠시는 대본을 더 이상 보지 않은 채로, 강당에 서있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자신의 말을 하기 시작했다. 남의 말로 써져있는 대본이 아닌, 자신의 말. 잘하는 지 못하는 지는 아츠시는 상관없었다. 실로 오랜만에 자신의 솔직한 말을 남에게 하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고개를 숙였다. 박수가 나왔다. 그 박수가 진심인지, 아니면 의례의 박수인지는 상관없었다. 아츠시 자신이 만족하는 말이었다.

아츠시는 단상을 내려와 아버지의 옆에 앉으며, 앞으로의 계획을 세웠다.

소년의 이름은 토도마츠. 명함에 적힌 전화번호로 온 통화로, 입학식이 시작하기 전, 통성명을 했다. 그리고 그에 관한 정보를 비서에게 알려주고는, 그가 어떤 사람인 지 확인해달라고 말했다.

입학식이 끝난 후, 그를 강당 뒤에 있는 청소부들의 탈의실에서 조금 떨어진 창고 앞에서 기다렸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장소에 서 있는 자신이 웃겼다. 시계를 확인했다. 오후 세 시 사십칠 분. 일곱 시 즈음에 이사장과 학과장과의 저녁식사가 있다. 가고 싶지 않았다. 거절한다면 할 수도 있을 법했다. 교내의 서류상으로 자신은 이미 알파로 적혀, 입학이 되어있을 거고, 그럼 자신이 더 이상 이사장에게 원하는 건 없었다. 그 이후의 일은 자신이 하면 되니까. 부모님도 없는 오롯이 아츠시와의 대화를 위한 자리였기에 회사에도 끼칠 영향은 없을 거고. 상관없겠지. 계산이 끝난 아츠시는 주머니에 있는 핸드폰을 꺼냈다.

“뭐해?”

그 순간 자신의 옆으로 누군가 왔다. 토도마츠였다. 자신을 기다리게 한 주제에 사과의 말도 없이 말을 건 토도마츠에게 아츠시는 핸드폰을 흔들어보였다.

“전화.”

“응. 기다려줄게.”

선심을 쓰는 말에, 아츠시는 어이가 없어 웃고는 이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대신 울리는 클래식이 기분이 나빴다. 기분 나쁜 소리를 듣고 있자니, 옆에서 뿌연 연기가 일었다. 코 끝에 닿는 담배 향에 아츠시는 손수건을 꺼내, 코를 가렸다.

“뭐야, 너 담배는 안 해?”

담배 연기를 아츠시의 반대 방향으로 내뿜은 토도마츠가 물었다. 아츠시는 고개만 끄덕였다.

“흐응.”

토도마츠는 입을 삐죽 내밀고는 다시 담배를 물었다. 클래식이 끝날 때까지 이사장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후. 아츠시는 한숨을 쉬고는 전화를 끊었다.

“누군데? 애인?”

“이사장.”

“이사장이랑 사귀어?”

대답할 가치도 없는 말에 아츠시는 토도마츠를 내려다봤다. 농담이야 농담. 하고 토도마츠는 웃고는 담배꽁초를 바닥에 비벼 끄고, 바로 옆 쓰레기통에 버렸다.

“요즘 여기서 그런 얘기 돌거든. 에이그룹의 회장 아들이 여기에 입학했는데.”

다분히 아츠시를 두고 하는 얘기다. 바로 앞에서 듣는 뒷얘기라. 아츠시는 코를 가리고 있던 손수건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담배냄새가 묻어, 더 쓰고 싶지 않았다.

“야. 그거 비싼 거 아냐? 왜 버려? 아, 아무튼. 너 진짜 입학 비리로 들어왔어? 이사장이랑 자서?”

눈을 빛내며 묻는 통에 아츠시는 머리가 다시 아파오기 시작했다. 떠도는 소문을 본인에게 직접 묻는 양이, 예의라고는 전혀 없는 행동이었다. 말투마저도 경박하기 그지없었다. 아츠시는 그걸 일일이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인터뷰는 오전의 걸로 충분했다. 고개만 저은 아츠시는 토도마츠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 담배.”

“안 하는 거 아냐?”

토도마츠는 말을 그렇게 하지만 아츠시에게 담배를 하나 주고는 라이터도 주었다. 아츠시는 담배를 물고, 손에 쥔 돌려서 켜는 수동식 라이터를 보고만 있었다. 사용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근처에 흡연자는 어머니뿐이었고, 어머니는 지포라이터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어휴, 이리 줘봐. 토도마츠는 아츠시가 쥐고 있던 라이터를 가져가, 그에게 불을 붙여주었다. 매캐한 연기가 눈앞을 가렸고, 주욱 들이키자, 입 안에 연기가 가득 찼다. 그리고 그걸 삼키자.

“콜록.”

자신도 모르게 연이어 기침이 나왔다, 눈물이 날 정도로 매운 연기였지만, 아츠시는 담배가 타들어갈 때까지, 담배를 폈다. 폈다고 해야 할지, 거의 대부분은 기침으로 내뱉었지만. 비웃거나 놀릴 줄 알았던 토도마츠는 옆에서 가만히 그런 그를 지켜봤다. 아츠시가 꽁초를 어설프게 바닥에 던지고 구둣발로 비벼 끄자, 토도마츠는 그거 쓰레기통에 버려. 라고 했을 뿐이다.

손수건을 찾던 아츠시는 방금 버린 걸 깨닫고, 손가락으로 대충 눈가에 고인 눈물을 닦았다. 자신의 모양새는 분명 웃길 것이다. 하지만 토도마츠의 앞이라면 별로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이상하게도 토도마츠는 예의가 없지만, 조금은 배려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츠시가 조금 여유를 찾자, 토도마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나, 어디서 자면 돼?”

“원래 어디서 잤는데.”

“그냥 여기 숙직실.”

삼월이라, 더웠다. 아츠시는 넥타이를 조금 헐겁게 풀고, 셔츠의 단추를 하나 풀었다.

“근처에 내 집, 하나 있을 거니까. 거기서 나랑 살면 돼.”

운이 좋게도, 게이오대는 아츠시의 집과는 꽤 거리가 있었다. 뭐, 그에게는 전용 기사와, 차도 있어 상관은 없었고, 집을 나올 생각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유모의 말에 따르면, 아츠시의 명의로 된 집이 게이오대 근처에 있다. 아버지의 입학 선물이겠지.

부모님은 아츠시의 생일이나 기념할 만한 날이 가까워오면, 그를 가장 잘 아는 유모에게 어떤 것이 좋냐고 묻는다. 그럼 유모는 그에 상응하는 답을 하곤 했다-이런 집에 오래 있다 보니, 그의 처세술은 아버지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아츠시는 장담한다―그리고는 부모가 결정을 내리면, 유모는 조심스레 아츠시에게 와서 이 때, 이런 선물을 받는다는 얘기를 흘리는 것이다. 아츠시의 대답은 항상 정해져 있었다. 좋아. 기쁘다. 어떤 선물을 받아도 기쁘게 받을 수 있도록, 아츠시는 준비를 하곤 했다. 유모의 배려였다. 아버지의 눈 밖에 나서는 안 되는 걸 알려주는 것이다. 이번의 오피스텔도 유모가 말했으리라. 어제 입학식에 입을 옷을 걸어주며 유모가 한 말이 떠올랐다.

‘이제 성인이 되셨으니, 조금은 떨어져있는 편이 좋을 거예요.’

그 말에 아츠시는 대충 눈치를 챘다. 부모가 아닌 유모가 주는 선물이다.

토도마츠는 아츠시의 말에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있을 거? 확실해?”

“음. 아마.”

“뭐야 그게.”

“우선 오늘은 지내는 데서 자. 내일 연락할게.”

토도마츠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손을 내밀었다.

“담뱃값 줘.”

아츠시는 그 말에 크게 웃었다. 아 정말 변한 것이 없는 솔직한 사람이다. 그게 도리어 안심이 되었다. 아츠시의 전화가 울렸고, 이사장의 전화였다. 아츠시는 전화를 받아, 선약이 있어, 저녁 식사를 취소해야겠다는 짧은 말을 하고 끊었다.

“밥이라도 사줄게.”

아츠시는 시계를 확인했다. 네 시 십삼 분. 밥을 먹기는 조금 이른 시간이었다. 하지만 토도마츠는 흔쾌히 대답했다.

“그러지 뭐.”

기사를 불러, 자주 가는 식당으로 향하는 동안, 아츠시는 비서에게 받은 토도마츠의 정보를 읽기 시작했다. 당장 본인이 바로 옆에 있지만, 일일이 묻기 보다는 직접 알아보는 게 아츠시의 예의였다. 그도 예의가 없기는 마찬가지긴 했다. 토도마츠는 아츠시가 읽는 게 자신에 관한 정보인 걸 알고는 웩하고 혀를 내밀고는 창밖을 봤다. 아츠시는 토도마츠가 자신을 비웃을 때처럼 별로 개의치 않아했다.

고등학교 중퇴에다가 경범죄나 성폭행전과까지 있는 토도마츠는 생각보다 꽤 드라마틱한 인생을 산 듯 했다. 출생마저도 좀 그랬다. 전부 알파인 일란성 여섯 쌍둥이, 그 중에 막내. 어릴 때, 잠깐 아역 배우 일을 했었고, 그 이후로는 전혀 없다가 고등학교를 중퇴한 후, 그러니까 아츠시를 만나기 한두 달 전에, 게이오대의 청소부로 취직을 했다. 그의 형이 도망친 건 좀 더 전의 일인가보지.

혹여 자신에게 눈에 띄게 접근하는 토도마츠의 배후에 다른 기업이나 정치세력이 있는 것을 찾고 싶었을 뿐인 신상털이는 너무나도 하찮을 정도로, 아무것도 없는 그로 인해 허무하게 끝이 났다. 아츠시는 서류의 마지막까지 읽고는 덮었다.

“다 봤어?”

“어. 형제가 많네.”

형제라는 단어에 토도마츠는 얼굴을 찌푸렸다.

“당당한 게 더 기분 나빠.”

“월세라고 생각하던가.”

담뱃값을 운운하던 토도마츠의 말을 따라하듯 아츠시가 말했다. 그 말에 토도마츠는 웃지 않았다. 꽉 막힌 도쿄의 거리를 천천히 기어가는 차는 걷는 편이 더 빠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츠시는 푹신한 카시트에 몸을 뉘었다. 피곤했다. 하루 만에 이렇게 많은 일이 터진 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레스토랑에 도착하면 분명 토도마츠와 신경전 같은 대화를 해야 할 터이니, 조금은 쉬어가는 게 낫다. 이렇게 피곤한 정신으로 그에게 휘둘리면, 약점을 잡힐 지도 모르니까. 아츠시는 힐끗 옆에 있는 토도마츠를 봤다. 도쿄의 거리가 신기하기라도 한 지, 창에 시선을 고정하는 꼴이 비행기를 처음 탄 아이 같았다.

토도마츠의 새까만 머리가 햇빛을 받아 빛나보였다. 아츠시는 창에 비치는 자신의 머리를 봤다. 색이 옅은 건 알고 있었지만, 토도마츠의 머리와 비교하니 훨씬 더 밝아보였다. 뭐. 상관없나. 아츠시는 토도마츠의 까만 머리를 보며 잠깐 잠에 들었다.

그 시간은 다섯 시였다.



네시


마츠노 토도마츠는 알파다. 그리고 아츠시가 말했듯이, 다섯 명의 쌍둥이 형제들이 있다. 일란성이라 얼굴과 혈액형이 같았다. 이 거지같은 성향마저도. 형제들은 마을의 꽤 유명한 말썽꾸러기들이었다. 물론 토도마츠도 포함된다. 그 말썽이라는 건 그 귀여운 어감처럼 당하는 상대도 그냥 웃고 넘길만한 가벼운 일들이었다. 자신들이 알파라는 사실을 깨닫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형제들은 바보같이 여자들에게는 심각할 정도로 숫기가 없었지만, 여자를 굉장히 좋아했다. 그렇지만 평균의 외모에 평균 이하의 집안. 그리고 그들에게 있어 유일한 메리트라 할 수 있는 유머러스함도 특유의 숫기 때문에 여자의 앞에서는 전혀 발휘되지 못하였기에, 그들은 근처에 여자라고는 어머니 외의 사람과 얘기를 한 적도 없었다. 하지만 사춘기 이후로 자신들이 알파임을 깨달은 그들은 여자들의 최하위에서 상위로 바뀌었다고 생각했다.

이 생각은 알파라는 성향을 받은 일반인 멍청이들이 자주 하는 행동이었다. 먹고 살기 바쁜 일반인들은 그런 것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 오메가는 국가에서 지급하는 억제제를 먹으며, 알파는 국가의 교육과 조절을 배운다. 그럼에도, 여자에 눈이 먼 멍청한 형제들은 이렇게 말을 했다. 아마 다섯 중의 하나였다. 어쩌면 자신일 수도 있지. 토도마츠는 자신이 잘못한 건 금방 잊고는 하니까.


그러니까 말야. 우린 알파잖아? 오메가를 강간하고도 저 녀석이 히트싸이클이었다는 말을 하면 죄가 성립이 안 된다고.


그 되도 않는 논리가 성립되는 건 어느 정도 재력이나 적어도 그걸 제대로 사용할 머리는 있어야했지만 돈도 없고 멍청한 그들은 그 힘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다. 그들은 그 자신들의 논리대로 길 가는 여성들을 강간했고, 개 중에는 오메가도 있었으나 태반이 베타였다. 가끔 알파도 있었고. 여자라면 전부 오메가. 라는 되도 않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몇 번이고 실수를 저질렀다. 낮은 곳에 있었던 것들은 갑자기 높은 지위를 부여받으면 제대로 사용하지 못한다. 그것으로 인해 망하기도 하고. 그 멍청한 족속들은 겨우 부여받은 높은 지위로 인해 범죄자가 되었고, 그렇지 않아도 평균 이하였던 집안은 합의금과 자식을 잘 못 키운 죄로 일어난 아버지의 해고로 인해 크게 기울었다.

형제들은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뿔뿔이 흩어졌고 토도마츠도 그 중 하나였다. 그들이 어떻게 살든 딱히 신경 쓰지 않는다. 연락도 되지도 않고. 자신이 형들에게 받은 거라곤 대학의 청소부자리 하나뿐이었다. 그거라도 다행이었지, 다섯 명 중에 세 명은 강간한 여성의 아이까지 책임을 져 꽤 힘들게 살고 있다고 하더라-라는 말을 듣긴 했다.

그런 그가 아츠시를 만난 건 행운이었다. 돈이 많은 데다, 그런 사람 치고는 꽤 자신에게 호감이 있었던 게 분명하다. 부자들 중에서는 취미가 고약해 알파인 남자를 옆에 두면서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는 사람도 있다고 들었었다. 그런 류의 사람인걸까. 토도마츠는 옆에서 잠든 아츠시를 봤다. 밝은 머리에 잘 어울리는 정장, 답답한지 풀어진 넥타이와 셔츠 윗 단추. 단정한 얼굴과는 다르게 아츠시는 생각보다 성질도 더러웠고, 깔끔한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도, 분명 잘 다린 셔츠를 입고 있었음에도 이상하게도 구겨지고 오래 된 교복을 입고 있는 자신과 다를 바가 없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뭐 조금 일탈을 하는 도련님같은 느낌이긴 하지만. 그 정도는 아츠시의 돈을 보면 그냥 넘어갈 수 있다. 세상 모두가 그렇듯이 말이다.

토도마츠는 얼굴을 잘 기억하는 편이다. 게다가 아츠시는 어딜 가도 눈에 띌 만큼 미남이었으니 더 그랬다. 잠깐 본 그의 얼굴이 편의점 가판대에 있는 신문에 박혀져 있는 것을 보고, 그 날의 저녁인 컵라면을 살 돈으로 신문을 사 읽었다. 생각보다 굉장한 사람이었다. 게다가. 정말 운명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아츠시는 자신이 일하고 있는 대학에 입학을 한다는 말 또한 덧붙여져 있었다. 그걸 보고 토도마츠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아츠시와의 첫 만남은 너무 분했다. 나이도 비슷해 보이는데-신문을 보니 같았지만-자신이 평생 벌어도 다 모으지 못할 돈을 들고 다닌다는 게, 짜증이 났다. 그래 뭐 솔직히 말하면 질투다. 나와 너무나도 먼 사람이었지만, 만약 다시 만난다면 내가 그 짜증나는 녀석의 위에 서고 싶었다. 근데 그것마저도 안 되잖아. 그래서 토도마츠는 웃었다. 자기 자신을 향한 비웃음이었다.

아츠시에게 잘 곳이 없다고 운운한 건, 그냥 던져본 말이었다. 부모와 함께 입학식에 온 걸 보면, 같이 사는 데다, 의지를 굉장히 하고 있다는 소리인데, 그런 부모가 자신을 허락해 줄 리가 만무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반응이 너무 웃겼다. 아츠시의 표정 변화가. 자신을 보고 놀라는 표정이라던가, 당황하는 표정, 일부러 외면하는 행동들까지. 자신보다 더 굉장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편하게 있었으면서, 이상하게 내 옆에만 오면 그러는 것들에 우월감을 느꼈다. 그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이라곤 이것뿐이었다. 그래서 더 귀찮게 치근덕댔고, 어쩌다보니, 뭐, 결과적으론 잘 됐지.

깊게 생각하지는 않는 편이다. 그런다고 뭐가 나오지는 않더라고. 이렇게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하다보면, 가끔 원하는 게 얻어 걸리곤 한다. 토도마츠는 다시 고개를 돌려 창밖을 봤다. 도쿄는 정말이지, 쓸데없이 넓었다.


아츠시가 말한 오피스텔은 대학교와 꽤 가까운 곳이었다. 게다가 둘이 살기에는 정말 턱없이 넓었다. 방이 네 개였고, 욕실은 두 개, 그리고 넓은 거실과 그 거실에 붙어있는 또 다른 넓은 주방. 청소하는 고용인이 두 명, 밥을 해주는 고용인이 한 명이라고 했다. 분명 아츠시의 것이라고 했으니, 혼자 살 생각으로 산 게 분명할 텐데. 토도마츠는 숙직실에 뒀던 자신의 모든 짐-그래봤자 백팩 하나, 캔버스 백 하나뿐이지만-을 자신이 살던 원래의 집 거실보다 더 넓은 자신의 방에 내려놓곤, 혀를 찼다. 넓은 방에는 책상과 의자, 그리고 붙박이 옷장들과 세 명이 누워도 괜찮을 침대가 있었다. 그리고 방에 딸린 베란다까지. 큰 키도 아니건만 다리를 펴고 눕기에는 턱없이 작은 숙직실의 침대가 문득 생각났다. 하룻밤만에 이렇게 바뀌다니. 이걸 뭐라고 하더라. 신분상승? 그래 성향같은 건 신분에 관계없었어. 형제들이나 나나, 알파가 아니라 베타였다면 조용히 그냥 평범하게 살았을 텐데.

“뭐 필요한 거 있어?”

아츠시가 방문을 열고 물었다. 필요한 거라. 토도마츠는 눈만 깜빡였다. 그리고는 아츠시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여전히 잘 다려진 셔츠와 바지를 입고 있었다.

“옷?”

“뭐?”

무슨 소리냐는 아츠시의 표정에 토도마츠는 웃었다.

“새 옷.”

너에게는 자존심을 버리겠다는 소리였다. 이 정도로 돈이 있다면, 나는 뭐든 해줄게. 아츠시는 의도를 아는 듯, 눈썹만 까딱이고는 지갑을 꺼내 돈을 내밀었다.

“같이는 못 가.”

그건 나도 싫거든. 토도마츠는 속으로 말하면서 아쉽네하고 웃었다. 받은 돈은 자신이 한 달동안 죽어라 청소를 해도 받을 수 있는 돈보다 훨씬 많았다. 괜찮네, 이거. 토도마츠는 아츠시의 눈앞에서 돈을 셌고 아츠시는 그걸 보고 또 웃었다.

아츠시의 오피스텔로 이사를 한 후, 청소부일은 당장 그만두었다. 해야 할 이유가 없으니까. 지금이라도 청춘을 즐겨야하지 않겠어?

토도마츠의 바뀐 일상은 이랬다. 아침에 일어나, 아츠시와 함께 고용인이 차려준 아침을 먹고, 학교를 가는 그를 배웅하고, 돈을 쓰러 나간다. 뭐든 상관없었다. 옷이든, 가방이든, 먹는 것이든 그냥 보이다가 마음에 드는 것이 있으면 전부 사버리는 것이다. 가격을 보지도 않은 채로. 그리고 아츠시가 가끔 주는 돈으로 결제를 한다. 꽤 행복한 삶이었다. 일을 하지 않고, 돈을 번다는 건 생각보다 더 멋진 일이었다.

아마 형제들 중에서는 내가 제일 잘 사는 편이 아닐까. 꽤 좋은 물주를 얻음으로써 말이다. 아츠시는 돈을 주고, 재워줄 집도 주는 데도, 토도마츠에게 딱히 바라는 것은 없었다. 솔직히 토도마츠는 그가 자신이 알파인 것을 알게 되면, 곁에 두지 않을 줄 알았다. 뭐, 돈 많은 사람이 없는 사람을 데려와 사는 이유는 뻔했으니까. 도대체 그가 내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길래 이렇게 두는가에 대해 토도마츠는 이런 일상을 살고 일주일이 넘어서야 생각이 났다. 그의 변덕이라면 가장 큰 문제가 된다. 금방 쫓겨나게 된다면 곤란하다고. 범죄경력이 있어서 일자리를 찾는 것도 꽤 고역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토도마츠가 그 고민을 시작한 지, 딱 삼 일이 지나서 아츠시는 처음으로 토도마츠에게 바라는 것을 말했다. 바라는 것이라고 해야 할까. 그냥 같이 술을 먹자는 얘기였다. 토도마츠는 의도를 모르겠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평일이지만 조금 더 일찍 돌아온 아츠시가 낮에 집에 있다는 게 조금 이상했다.

아츠시는 토도마츠가 봐온 대학생들보다 훨씬 더 바빠 보였다. 대학생이라면 아마 수업이 없는 날도, 아침 수업을 없앨 수도 있을텐데, 아츠시는 항상 일정한 시간에 나가, 같은 시간에 들어왔다. 고등학생과 똑같이 말이다. 그리고 주말이 되면, 하루는 서재에-빈 방 중에 하나를 서재로 만들었다-있었고, 다른 하루는 잘 차려입고 밖에 나가고는 했다. 집에서 쉬는 아츠시를 일주일과 삼 일, 그러니까 열 손가락을 다 쓰는 24시간 중에서 본 적이 없다. 반말로 전화를 한다거나, 친구를 데려온 적도, 술에 취해 들어온 적도 없었다. 밖에서 알아서 놀지 않을까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귀가한 아츠시는 정말이지 재미없다는 얼굴만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을 볼 때는 그렇게 즐겁다는 표정으로 웃고만 있었으면서.

아. 토도마츠는 번뜩였다. 어쩌면 내가 다르니까 재밌어서 나를 옆에 두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을 웃기게 하는 재주라면 꽤 자신있으니까. 토도마츠는 무표정하게 거실소파에 앉아있는 아츠시의 옆에 앉았다.

“나갈거야?”

“아니. 그냥 집에서 먹자. 간단하게.”

옆에 있는 자신을 보지 않은 채로 멍하니 말하는 그는 익숙하게 고용인을 불러 이것저것 부탁을 했다. 토도마츠는 그런 그를 보고만 있었다. 아츠시가 없는 집에는 자신과 세 명의 고용인이 있는데, 이상하게도 그들에게 뭔가 부탁을 하기가 힘들었다. 밥을 해주는 고용인의 좋아하는 것이 있냐는 질문에 뭐든 좋아한다는 말도 못한 채 그냥 웃어만 보였고, 청소를 해주는 고용인이 혹시 건드려서는 안되는 것이 있는 말에도 그냥 고개만 저었다. 뭐라고 해야할지 모르겠다. 며칠 전만 하더라도 그들과 같은 일을 하고 있었는데. 적응이라는 게 생각보다 힘들었다. 아니 적응하고 싶지 않았다.

아츠시가 확실한 이유를 알려줄 때까지는.

부엌에서 나는 덜그럭소리를 들으며 아츠시와 토도마츠는 나란히 소파에 앉아있었다. 커다란 텔레비전이 있었지만, 아츠시가 그걸 켠 적은 없었다. 토도마츠는 힐끔힐끔 그의 눈치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무슨 일 있어?”

“별로.”

“오늘은 일찍 왔네.”

“수업이 일찍 끝났어.”

“무슨 수업 듣는데?”

그 말에 아츠시는 고개를 돌려 토도마츠를 보며 대답했다.

“경영학.”

시선이 마주치자 토도마츠는 웃었다. 아츠시가 자신을 보고 웃을 때는 딱 한 가지 상황뿐이었다.

“재미 없는거 하네. 너랑 똑같이.”

이렇게 쓸데없는 도발을 할 때. 아츠시는 예상대로 웃었다.

“그러게.”

이상한 새끼. 토도마츠는 속으로 욕을 했다.


고용인이 차려온 술상은 간단하지만 뭔가 화려했다. 한 입 크기로 잘려있는 과일들과 치즈를 얹은 크래커, 살라미 같은 것들이 길쭉한 접시에 가지런히 담겨있었고, 그 옆에는 와인잔과 얼음 통에 담겨있는 와인이 있었다. 와인이라. 먹어본 적 없는데. 아츠시는 고용인들에게 이만 가라는 손짓을 했고, 그들은 가볍게 인사를 하고 집을 나갔다. 토도마츠는 멍하니 소파에 앉아 거실 테이블에 있는 것들을 보고만 있었다.

“와인, 괜찮아?”

다 차려놓고서는. 토도마츠는 고개만 끄덕였다. 어차피 자신이 먹어본 술이라고는 싸구려 맥주정도였으니까. 이자카야의 생맥주도 그에게는 부담스러운 금액이었다.

아츠시는 익숙하게 와인의 코르크를 따고는 와인을 따라주었다. 둥근 와인잔의 안쪽을 천천히 돌며 채워지는 붉은 와인은 어디선가 영화에서 본 느낌이 들었다. 두 잔을 다 채운 아츠시가 와인잔을 잡아들자, 토도마츠도 그를 따라 들었다. 그리고 가볍게 챙하고 서로의 와인잔을 맞부딪혔다. 어색한 장면에 토도마츠는 입을 열었다.

“불 끄고 양초라도 켜야 될 거 같네.”

“촌스럽게.”

촌스럽기는. 네가 입는 셔츠색이 더 그렇거든. 토도마츠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가 와인잔에 입을 댔다. 알싸한 향 끝에 살짝 달콤한 향이 맴돌았다. 잔을 조금 기울여 입 안에 와인을 머금었다. 향이 입 안에 가득 찼다. 그리고 천천히 넘기자, 부드럽게 넘어가며, 톡 쏘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입에 조금 남는. 이상하게 텁텁한 느낌. 맥주와는 전혀 달랐다. 살짝 단 향이 마음에 들었기에, 거부감은 없었지만 아마 자신의 앞에 항상 먹는 편의점에서 가장 싼 맥주와 이 와인을 고르라고 하면 당연히 전자를 고를 정도다.

토도마츠는 손을 뻗어, 치즈를 올린 크래커를 먹었다. 텁텁한 향을 치즈가 감싸줬다. 음. 괜찮네. 토도마츠는 옆에 앉아있는 아츠시를 봤다. 어느새 한 잔을 다 비운 아츠시는 다시 잔을 채우려 병을 들었다.

“따라줘?”

“할 줄은 알아?”

“별 거 있어?”

토도마츠는 자신을 당연하게 무시하는 말에 어깨를 으쓱하곤, 그가 잡고 있던 병을 들어, 그의 잔에 물을 따르듯 콸콸 와인을 채웠다. 잔의 반을 넘게 채우고는 와인 병을 그대로 뗐다. 그러자, 병 입구에 고인 와인이 소파위로 떨어져, 얼룩이 남았다.

에고. 토도마츠는 얼룩을 봤다. 아츠시는 눈치 채지 못 한 듯, 자신의 반 정도 채워진 잔을 보고 웃고 있었다. 진짜 이상한 새끼라니까. 토도마츠는 잔을 잡지 않은 손을 소파의 얼룩 위에 얹어, 가렸다.

“자, 짠 해. 짠.”

아츠시는 웃음을 멈추지 않은 채로 그의 잔에 살짝 부딪혔다. 말없이 서로 와인을 따라줬다. 토도마츠는 아츠시가 와인잔의 1/3정도만 채워주고, 병을 뗄 때, 살짝 돌려 병 입구에 고인 와인이 떨어지지 않게 하는 것을 보고, 그제야 그가 왜 웃었는지 알았다. 자신의 근처의 사람과 다르면 뭔가 그게 재밌기라도 한 건가.

다 마신 와인 병이 세 병 쯤 되었을 때, 토도마츠는 취기가 올라 조금 어지러웠다. 아츠시는 네 번째 병을 들고, 따려다가 코르크따개를 떨어뜨렸다. 대리석의 바닥과 철인 코르크따개가 맞부딪히는 소리에 토도마츠는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봤다.

“뭐야. 취했어?”

“……아니.”

아츠시는 코르크따개를 주으며 대답했다. 아니기는. 토도마츠는 그의 얼굴이 굉장히 붉어진 것을 봤다. 손으로 자신의 볼을 만져봤다. 나도 그러려나.

아츠시는 따개를 다시 주워서, 병을 겨우 땄다. 하지만 토도마츠의 잔에 따르려다 바닥에 흘릴 뻔 했기에, 토도마츠는 그의 병을 뺏어, 스스로 자신의 잔에 채우고, 아츠시의 잔에도 채워줬다. 아츠시는 멍하니 채워지는 자신의 잔을 보면서 입을 열었다.

“좋겠네-. 알파라서”

됐다. 자신의 앞에서 인사불성이 되어 꼬인 혀로 말을 하는 아츠시를 보며 토도마츠는 씩 웃었다. 같이 살면서, 아츠시는 처음과 다르게 꽤 다정했다. 원하는 것을 다 사주고, 그에게 혼자 있으면 심심하지 않냐며 학교를 다니는 건 어떠냐고 까지 제안을 했었다. 공부와 담을 쌓은 그였기에 곧바로 거절을 했지만. 토도마츠는 편하지 않았다. 부자들의 변덕에 장단을 맞춰주는 것은 처음이었다. 아마 여기서 조금이라도 잘 못하면 운이 나쁘면 죽거나 혹은 그나마 정은 있는 사람일 테니, 살려준다면 쫓겨나 며칠 전처럼 푼 돈이나 벌고 다니는 삶으로 돌아갈 것이 분명했다. 운이 좋게 얻은 약점을 잡은 토도마츠는 그제야 두 다리를 뻗고 자겠다는 생각을 했다. 데려온 의도를 모르겠다면 적어도 자신을 계속 옆에 둘 이유는 만들어야 되니까.

“무슨 소리야? 너도 알파잖아.”

토도마츠는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질문을 날렸고, 아츠시는 고개만 저었다.

“돈 많은 집들은 알파만 낳는다던데?”

그 말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가 되었든, 아츠시는 알파는 아니지만 알파인 척을 하며 살아가기라도 하는 건가? 토도마츠는 고개만 갸웃했다. 근데 그게 어때서. 돈 많은 집 자제들의 성향이 전부 알파라는 건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알파가 아닌 사람은 제명이라거나 호적에서 판다거나 뭐 그런 얘기는 들은 적도 없는걸. 성향 사이의 능력이 차이가 있다는 말은, 성별에 따라 능력이 차이가 난다는 것만큼 잘못된 생각이라는 건 다들 알고 있다. 별로 상관없지 않나. 토도마츠는 취기가 올라 몽롱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아츠시만큼은 취하지 않았기에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토도마츠는 그냥 그 비밀을 자신이 알고 있다는 걸 잊지 않기 위해 속으로 그렇게 말하는 아츠시를 대뇌었을 뿐이다.

와인이 잔에 따라질 때 나는 소리, 그 잔을 보면서 말하는 아츠시의 조금 젖은 목소리, 흐트러진 머리와 셔츠. 그리고 그 말을 하고서 진심으로 자신을 부러워하는 표정을 짓는.

아.

토도마츠는 지끈거리는 머리에 눈이 떠졌다. 소파에서 자신은 자고 있었다. 아픈 머리와 소파에 자고 있다는 걸 제외하면, 자신이 어제 아츠시와 술을 먹은 것들이 꿈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어제 분명 낮에 술을 마신 것 같았는데, 눈을 뜨니 아침이다. 고용인들이 언제 와서 언제 치웠는지 모를, 어제만 해도 와인 병이 굴러다니던 거실 탁자는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누워있던 자신의 몸 위에는 담요가 덮어져 있었다. 깨질 듯이 아픈 머리에 토도마츠는 일어날 수가 없었다.

탁.

탁자에 뭔가 놓이는 소리에 토도마츠는 겨우 고개를 돌렸다.

“너, 술이 약하네.”

네가 더 약하겠지. 토도마츠는 대꾸할 힘도 없어서 그냥 그를 보고만 있었다. 분명 어제 자신보다 더 취했을 아츠시가 여전히 깔끔하게 정돈된 머리를 하고, 옷을 입은 채로 탁자 앞에 서 있었다.

“이거 마셔. 숙취에 좋은 거니까. 난 나간다.”

“…응.”

토도마츠는 갈라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츠시는 토도마츠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고는 나갔다. 그 촉감에 토도마츠는 눈을 감았다.


그 날 이후로 아츠시는 종종 토도마츠와 술을 함께 마셨다. 와인뿐만이 아니라 샴페인이나 가끔은 토도마츠가 사온 맥주를 마시기도 했다. 별 말이 없었던 술자리는 수를 거듭해갈 수록, 더 많은 얘기를 하기 시작했고, 토도마츠는 자신이 겪었던 어렸을 때, 재밌었던 얘기를 하는 편이었고, 아츠시는 그와 상반되는 꽤 어두운 기업가들의 뒷얘기를 하고는 했었다. 아츠시 그 자신의 얘기는 전혀 하지 않았다. 토도마츠가 요즘 학교는 어떠냐는 가벼운 말을 하면, 그냥 그렇다는 말로 넘어갈 뿐, 자세하게 얘기하지는 않는다. 토도마츠는 그런 아츠시에게 딱히 불만은 없었다. 아츠시가 하는 얘기들은 증권가 찌라시처럼 꽤 흥미로웠고, 그런 그들을 한심하게 여기며 말하는 아츠시의 표정도 꽤 볼 만 했기 때문이다.

아츠시는 성인이 되면서, 뉴스에 자주 나오고는 했다. 공모전을 수상한다거나, 아니면 학교에서 무슨 활동을 할 때도, 어느 나라의 왕자처럼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나오곤 했다. 토도마츠는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아츠시의 아버지가 경영하는 기업은, 토도마츠가 쓰는 모든 물품을 만들어 내는 기업이라는 걸. 그리고 당연하게 그걸 물려받을 예정인 아츠시가 주목을 받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토도마츠는 아츠시가 뉴스에 나올 때마다, 신기한 듯 화면을 봤다. 자신과 같은 집에서 살고 있는 동갑의 물주가 이런 사람일 줄이야. 몇 번이고 봐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취한 아츠시의 표정처럼 말이다.

아츠시의 주량은 약한 편은 아니다. 하지만, 고등학교 때부터 술을 먹어온 토도마츠보다는 조금 약했다. 덕분에 토도마츠는 항상 그의 취한 모습을 볼 수밖에 없었다. 아츠시는 취하면 더운지, 셔츠 단추를 풀고, 머리도 살짝 흐트려놓곤, 멍한 눈으로 솔직한 자신의 얘기를 꺼내곤 한다. 긴 얘기는 하지 않고, 그냥 조금 낮은 목소리로 한 두 마디를 할 뿐이었다. 학교에서 뭐가 힘들었는지, 어느 날은 파파라치가 붙어 귀찮았다는 얘기도 했었고, 또 어떤 날은 아버지의 참견이 귀찮다는 얘기도 했었다. 아츠시와 술자리를 이어갈 때마다, 토도마츠는 그의 약점을 하나하나 잡을 수 있었다. 정말 사소한 것이지만, 토도마츠는 술에 취해 쓰러져 자는 아츠시의 머리를 정리해주며 그 내용을 대뇌이곤 했다. 다음날까지 기억할 수 있도록. 자신은 그렇게 머리가 좋은 편은 아니니까.

“너, 평생 이렇게 살 생각이야?”

아츠시는 술에 취했을 때를 제외하고는 조금 짜증난다. 거만하기도 하고, 대놓고 사람을 무시하기도 한다. 이게 동거를 하고 나서 다정해진 것이라고 생각하니, 그 전에 자신은 어떻게 그와 함께 살 생각을 했는지도 모를 정도다.

“무슨 소리야?”

“평생 내 돈 받으며 살 거냐고.”

그 말의 의미는 알고 있다. 적어도 뭔가 생산성 있는 일을 하란 소리지. 생산성 있는 일하고 있는데, 네 비위 맞추는 거. 토도마츠는 속으로 그를 후려치는 생각을 하며, 그가 좋아하는 행동을 했다. 그에게 다행인 건 아츠시가 빌빌 기는 행동을 싫어한다는 것 정도다.

“왜, 아깝기라도 한가봐?”

“그럴 리가.”

아츠시는 어이없다는 듯 웃고는 그에게 돈을 내밀었다. 토도마츠는 입을 샐쭉 내밀고 받았다. 그가 가끔 이럴 때는 토도마츠는 자신이 알고 있는, 그의 비밀을 꺼내고 싶어진다. 물론 토도마츠가 그의 집 안에서 그의 돈을 받고 그의 고용인이 해주는 밥을 먹으며 살지만, 자신이 이런 비밀을 알고 있다는 것 정도는 그에게 알려줘도 될 것이다. 적어도 대우라도 고쳐주지 않을까. 네가 왜 친구가 없어서 나랑 술 먹는 지 정도는 알 거 같아. 진짜로. 토도마츠는 나가는 아츠시의 뒤에서 혀를 낼름 내밀었다.

아츠시가 나가는 걸 보고는 토도마츠는 뒤를 돌아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컴퓨터를 켰다. 뭐, 요즘 사고 싶은 건 거의 다 샀으니까, 심심하기도 하고. 게다가 아츠시가 그런 식으로 말한 것에 좀 짜증이 나기도 했다. 이런 말을 듣고도 변하지 않는다면, 그런 자신이 싫을 것만 같았다. 그럼. 뭐라도 해볼까. 토도마츠는 구인 사이트를 뒤지다가 문득 자신이 뭘 하려고 해도, 발목을 잡는 것이 생각났다.

범죄이력. 학생때 저지른 일이긴 했고, 처음 몇 번은 합의금으로 넘어갔지만, 그 덕분에 집안이 기운 이후로는 합의고 뭐고, 제대로 처리된 적도 없었다. 결국 자신의 이름이 경범죄자 리스트에 올라갔고, 학교 퇴학으로 이어지기까지 했다. 면접 때, 말을 잘 하면 넘어가긴 하겠지만, 음. 글쎄. 토도마츠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사실 가벼운 절도 같은 건 다들 넘어가는 편이다. 재고조사나 계산대를 보는 일을 자신에게 맡기지는 않겠지만. 단지 좀 발목을 잡는 건 강간이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정말 잘못된 짓이니, 대가를 치르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흐음.”

토도마츠는 구인 사이트를 끄고는, 쇼핑몰 사이트를 켰다.


아츠시가 돌아올 때까지, 결국 토도마츠는 평소와 같이 돈을 쓰고만 있었다. 뭐, 중간에 긴 낮잠도 자긴 했고. 어쩌겠어. 아츠시가 다시 그런 말을 한다면, 이렇게 얘기라도 해줘야지. 나는 근본적으로 좀 잘못된 사람이라, 어쩔 수가 없어. 새벽 한 시가 넘어서 들어온 아츠시는, 긴 낮잠 덕에 이제야 씻고 나온 토도마츠를 보며 입을 열었다.

“술 마실래?”

그 말에 토도마츠는 웃었다. 기회다.

“좋아. 씻고 와. 내가 말해 놓을게.”

아츠시와 처음으로 술을 마시고, 그의 약점 중 지금까지는 가장 큰 약점을 잡은 이후로 토도마츠는 고용인들에게 이런저런 부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과 자신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아츠시와는 다르게 토도마츠는 조금 더 상냥하게 그들을 대하고는 했다. 그야 자신은 아츠시보다 가진 게 없으니까. 그리고, 뭐 혹시 쫓겨나더라도 상냥하게 해준 사람이라며 나중에 뭐 일자리라도 줄지 어떻게 알아.

토도마츠는 부엌으로 가, 냉장고의 문을 열었다. 옆에 와인냉장고가 있었지만, 와인은 마시고 나면 머리가 너무 아팠기에, 아츠시가 제안을 하지 않으면 절대 마시지 않았다. 마침 자신이 좋아하는 달콤한 샴페인 몇 병이 있었다. 그걸 보며 토도마츠는 웃으며, 고용인에게 다정하게 부탁했다. 부엌을 담당하는 고용인은, 나이가 꽤 많은 남자였는데, 느긋한 행동과 표정과는 달리 모든 걸 빠르게 해내곤 했다. 그러면서도 맛은 좋은 음식을 만들어내, 가끔 신기하다며 그가 요리하는 것을 구경하고는 했었다. 그는 그럴 때마다 그냥 웃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 집의 고용인들은 전부 그랬다.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하는 말이라고는 들어가도 되냐는 질문이나, 뭐가 먹고 싶냐는 가벼운 얘기들 뿐, 그 마저도 아츠시의 앞에서는 더 말을 삼갔다. 토도마츠는 꽤나 시끌벅적한 집에서 살아왔기에, 이런 차분하고 고요함이 조금 어색했다. 그래서 그는 혼자 있을 때는 항상 노래를 틀거나, 텔레비전을 틀어 놓았다.

고용인은 아츠시가 목욕을 끝냈을 때 즈음에 모든 음식을 준비하고는 부엌의 식탁에 올려놓았다. 토도마츠는 그냥 그걸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요리를 하는 도중에 누군가 옆에 있으면 귀찮을 법도 한데, 그는 아무런 말이 없이, 그냥 자신의 일을 묵묵하게 했다. 토도마츠는 남이 하는 요리를 볼 때마다, 이상하게도 어머니가 생각이 났다. 많은 양의 요리를 해야 했기에, 형제들이 돌아가면서 어머니를 돕고는 했는데, 철이 없었던 자신은 항상 그걸 빼먹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어머니의 손놀림을 그냥 고용인의 것에 투영시키면서 그를 그냥 보기만 했다. 그냥. 조금.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다 됐어?”

“응. 대충.”

아츠시가 목욕 가운만을 입은 채로, 머리를 수건으로 닦으며 나왔다. 토도마츠도 씻은 직후에 옷을 갈아입지 않았기에 그와 같은 가운을 입고 있긴 했다. 토도마츠는 고용인이 샴페인 잔을 식탁에 놓는 동안, 냉장고에 있는 샴페인을 꺼냈다.

“샴페인, 괜찮지?”

“응.”

아츠시는 수건을 목에 맨 채로, 식탁에 앉았다. 그러자 고용인들은 그에게 목례를 하고는 집을 나갔다. 이 새벽엔 대중교통도 없을 텐데, 어디로 가는 걸까. 몇 시간 뒤면 다시 돌아와야 할텐데. 토도마츠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나가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아츠시는 잔을 들었고, 토도마츠는 그 잔에 샴페인을 따라주었다.

토도마츠가 이 샴페인을 좋아하는 이유는 몇 가지 있었다. 탄산이 너무 강하지 않았고, 자신이 좋아하는 정도의 단 맛이었으며, 무엇보다.

“후우.”

도수가 센 주제에 마시기는 쉬워서 아츠시가 금방 취하고는 했다. 한 병을 비우고는 얼굴이 더운지, 목에 걸린 수건을 옆 의자에 걸어놓는 아츠시를 보며, 토도마츠는 씩 웃었다. 아츠시는 평소에는 뭔가를 잔뜩 경계하는 느낌이지만, 취하면 취할수록 조금 사람이 순해진다. 자신이 아츠시에게 그의 비밀을 알고 있다는 걸 말할 타이밍은, 그가 조금 더 취해서 기억이 희미해지기 전, 하지만 그의 경계가 아직 곤두서 있던 것을 푼 후, 그러니까. 뭐. 지금

아츠시가 알파를 부러워한다는 건, 베타나 오메가라는 소리다. 토도마츠는 그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한다. 알파가 오메가를 알 수 있는 건, 오메가가 히트사이클일 때 내뿜는 페로몬 향을 맡을 수 있기 때문이다. 히트사이클을 조절하는 약을 잘 챙겨먹는 오메가라면, 눈치 채기가 힘들다. 평소에는 거의 같으니까. 성향이라고 딱히 달라지는 건 없다. 토도마츠는 잘 알고 있다. 가장 높은 계급의 성향인 자신의 삶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말이지.

“있지, 너.”

“응.”

“아침에 말인데.”

“뭐?”

아츠시는 샴페인 잔을 기울여 샴페인을 전부 마시고는 취기가 올라오는 지, 머리를 잡고 물었다. 토도마츠는 씩 웃으면서 그를 마주보고 말했다. 상위 계층은 아마 쓸데없이 성향으로 위아래를 나눈다지 아마?

“너 베타주제에, 건방진 말 했잖아.” 그 말을 들은 아츠시가 취기가 깼다는 건 자신도 알 수 있었다.

“뭐, 뭐?”

“베타주제에. 건방지다고-.”

토도마츠는 멍청하게 자신을 보는 아츠시를 봤다. 상위의 사람들은 꽤 눈치가 빠르고 인간 외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매체에서 나왔는데, 지금 꼴을 보니 자신과 동갑인 친구들과 다를 바가 없다. 아츠시는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내가 베타인건…어떻게 알았어.”

진지하게 이런 걸 묻는 꼴이 웃겨서 토도마츠는 장난스레 코를 쥐어 잡으며 입을 열었다.

“너 냄새나 베타냄새.”

자신이 알파인 걸아니까, 오메가라고 생각했었는데, 아니었나보다. 솔직히 그러면 잘 의향은 전혀 없지는 않았다. 꽤 미남이고, 토도마츠는 여자가 더 좋았지만 그 정도 돈을 위해서라면 눈 딱 감고 호모의 기둥서방이라도 하자 싶었다. 하지만 그 결심을 비웃듯이 그것도 아니었다. 베타라. 진짜 친구가 필요했던 걸까. 배가 불렀네. 정말.

토도마츠는 당황하는 아츠시의 표정을 빤히 쳐다봤다. 토도마츠는 웃으며 손사레를 쳤다.

“하하. 뭐야. 진짜인가보네. 그냥 찍어 맞춘 건데. 아무리 알파라도 그런 거 몰라.”

“뭐, 뭐?”

토도마츠는 아츠시의 표정에 그냥 웃을 수 밖에 없었다. 아츠시는 생각보다 순진했다.

아니. 자신이 너무 때가 탄 걸 수도 있다.

토도마츠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민망한 듯 잔을 들어 마시는 아츠시를 보다가 문득 탁자를 봤다. 탁자에 널려 있는 이름도 모를 샴페인, 자신이 먹어왔던 와인들은 상상도 못할 만큼의 가격일 것이다. 안주로 나온 과일이나 카나페 치즈 따위는 맛도 없는 주제에 저 한 접시면 그간 부모가 대준 합의금은 우습게 넘기겠지. 토도마츠는 그를 비웃던 행동을 관두고 눈을 마주치고 최대한 귀엽게 웃었다.


잘 보여야지. 친구를 원하면 그렇게 놀아 줄 수는 있다. 형제들처럼 되기는 죽어도 싫으니까.

문득 본 시계는 새벽 네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dlt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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